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황후 여씨 (문단 편집) === 여씨(呂氏) 천하 === 유방이 임종하는 자리를 지킨 여후는 잠시 욕심이 솟아서, 유방의 죽음을 숨기고 황명을 사칭해 공신들을 대거 숙청하고 자신이 공식적으로 정권을 장악해보고자 했다. 그러나 우연히 정황을 포착한 역상이 "[[번쾌]]나 [[진평]] 같은 공신들이 거의 대부분의 군사를 데리고 바깥에 나가있는데 그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어쩔 셈이냐"며 넌지시 압박하자 계획을 포기했다. 이에 유방의 장례를 치르고, 공신들을 자극할 생각도 거두었다. 하지만 아들인 혜제의 자리를 위협한 [[척부인]]과 [[유여의]]에 대한 원한만은 접지 않았는데, [[한고제|유방]]이 사망하고 아들인 [[혜제(전한)|혜제]]가 즉위하자, 여후는 우선 척부인에게 머리카락을 자르는 곤형을 가하고, 목과 발목에 쇠고랑을 채워서 [[궁녀]]를 가두는 감옥인 영항(永巷)에 감금하고 하루 종일 [[쌀]]을 찧는 형벌을 내렸다. 그 다음에 조왕 유여의를 장안으로 소환한 후 제거하고자 했다. 조나라 재상이 된 주창은 여치의 의도를 파악하고 세 번에 걸친 소환 명령을 조왕의 병환을 핑계로 모두 거절했다. 이에 여후는 방패막이인 주창을 소환해 유여의를 지킬 사람을 치워버렸고 결국 조왕 유여의는 소환됐다. 유여의는 명을 어길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장안으로 출발했고, 궁궐에 입궐했다. 모친과 달리 인자한 성격이었던 혜제는 이런 어머니의 속셈을 간파하고는, 미리 이복 동생을 마중나가 바로 자신이 기거하던 건물로 데려와 침식을 모두 같이 하며 자신의 옆에 끼고 보호했다. 그러나 혜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의는 혜제가 아침 일찍 활쏘기를 하러 나가 자리를 잠시 비운 사이에 독살당했다. 아직 10세인 어린아이라 일찍 일어나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조왕 유여의의 사망으로 모든 기반이 사라진 척부인 또한 산 채로 수족을 자르고, 눈을 뽑은 후, 음약(瘖藥)을 먹여(또는 혀를 잘라) 벙어리로 만든 다음 귀에 유황을 부어 귀머거리로 만들어서[* 고막을 연기로 그을려 태우는 방법이었다고도 한다.] 돼지우리(뒷간을 겸하는)에 던져졌다. 이를 가리켜 사람돼지란 뜻인 '인체(人彘)'라고 불렸다. 참고로 여기 쓰인 '돼지 체(彘)' 자는 [[사어#s-3|거의 쓰이지 않는 벽자인데]], '''바로 이 사건 때문이었다.''' 춘추전국시대 글에는 종종 보이는 글자지만, 이 일 때문에 사람들이 끔찍하게 여겨 사용을 꺼리면서 한나라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사장된 것이라고. [* 야사인만큼 적당히 걸러서 듣도록 하자.]야사에는 음부를 짓이겼다거나 남자 죄수들에게 던져 주었다고도 한다. 또 그녀의 아들 조왕 유여의의 시체를 가져와 보여주며 농락했다고 한다. 이 사람돼지 일화는 여후의 잔학함을 잘 보여주는 가장 유명한 일화다. 특히 여후는 유방의 다른 첩들도 궁에 유폐하는 등 박대했으나 이렇게 잔인한 죽음을 당한 것은 척부인이 유일했다. 원한과 복수심에 사로잡혀 명분과 세력이 없는 유여의를 죽이고 척부인을 잔인하게 살해한 것은 옹호가 불가능한 악행인 것은 자명하지만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척부인도 마냥 억울한 피해자로 보기 힘들었다. 인간돼지 사건의 충격이 너무 커 여후의 잔혹성만 집중해서 많이들 잊어먹는 부분인데 비록 유방이 원인을 제공한 것이 크긴 하지만[* 정치적 목적에서 여후를 배제 및 약화한다면 [[태종(조선)|여씨 일족을 대거 숙청하거나]] 여후의 정치적 최측근를 배제 및 제거해 권력 기반을 제거, 여후가 딴 마음을 못 품게 만드는 형태로 만드는 것이 현실적이고 충분히 좋은 차선책도 있었다. 그런데 장성하고 평판도 좋은 적장자를 놔두고, 단순히 후궁의 자식을 [[이궁지쟁|자기가 좋다는 이유 하나로 태자로 삼으려고 한 것]]은 군주로서도 의무를 저버리고 가장의 의무를 망각하고 정실의 체면과 권위를 훼손한 행위에 불과하다. 결과적으로 유영의 지지 세력이 막강해져 여후에게 더 유리해졌기에 여후 견제라는 의도도 불명확해졌다. 여후가 섭정으로서 저지른 악행들은 비판받아야 하지만 황후 시절 일어난 태자 교체 사건에 한해서 피해자인 것은 사실이다.] 이미 정통성이 확실한 태자를 교체하는 부분에 대해서 비록 외척이나 파벌을 끌어들여 대립하진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를 사양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은 것은 여후에게 있어서는 분명히 위협적으로 보였을 것이며, 내명부의 수장인 황후의 입장에서도 용납할 수 없는 행위였다. 때문에 태자 교체 사건 한해서는 여후와 유영은 피해자의 입장이 맞았고 신하들이 춘추전국시대 진(晉)나라의 [[진헌공]]의 애첩 [[여희]]의 사례를 들면서[* 여희도 자세한 것은 문서에 나와있지만 자신의 아들 해제를 진의 군주로 만들기 위해 적장자 겸 후계자인 신생을 온갖 음해질과 누명을 씌워 자살을 시켰다. 진헌공 사후 아들을 즉위시키는데 성공했지만 첩에 불과한 여희의 권력은 남편에게 온 것이기에 얼마 못 가 반란이 일어나 아들도 살해되고 본인도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 후 요부로 기록되어 비판과 비난에 시달리게 되었다.] 태자 교체를 적극적으로 반대를 한 것은 여후의 본성을 몰라서도, 여후 모자를 개인적으로 좋아해서도 아니였다. 전한 이전 [[호해]] 치세의 통일 진나라가 멸망한 것은 호해의 폭정만이 아니라 호해의 정통성이 너무 떨어져서 지지도가 너무 낮았던 것도 원인이었다. 호해는 부소 다음의 차남도 아니고 18남이라서 정상적인 방법으로 황제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호해는 계승권이 없어 정치적으로 위협이 될 수 없는 여자 형제들까지 전부 살해하며 지저분하게 황위에 올라야 했고 정통성이 떨어지는 군주가 폭정까지 하니 내부분열이 빠르게 일어난 것이다. 이런 사례들이 있었으니 신하들은 내란 끝에 세워진 국가와 유방을 위해서라도 유방의 그릇된 선택을 목숨과 커리어를 걸어서라도 막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과거에 적장자만이 가문을 계승할 수 있었던 것은 정실의 자식인만큼 정통성이 정당하고 증명된 권력 기반이었다는 소리로[* 서자가 왕위와 가문을 계승한 경우는 적장자가 없을 때(적장자가 이른 나이에 죽었거나 정실이 아이를 낳지 못하거나)만 가능했다. 극히 예외로 전국시대 조나라의 초석을 쌓는 [[조간자]]는 [[조양자]]가 서자임에도 적자들을 제치고 조씨 가문의 후계자로 삼기도 하였으나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물었으며 이렇게 후계자가 되더라도 구설수가 많았기에 후계자가 된 서자는 정실의 아들로 들어가 신분세탁을 하거나 정실이 양육을 맡는 등의 수를 써야 서자 취급을 받지 않았다. 그 후에도 가장이 된 서자들은 생모를 정실로 추존해 정통성 확보에 신경을 썼고 본인들도 자신들의 적자를 후계자로 삼는 등 유교적 질서 하에서는 결국 적자 우선이라는 사항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이런 부분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운 유목민족들은 태자밀건법을 시행한 청나라와 같이 굳이 적자에 집착하진 않긴 했지만 그렇다고 적자와 서자를 동일하게 취급한건 아니었다.] 여후가 척부인을 증오한 것은 단순히 치정 문제로 인한 투기로 증오한 것이 아니라 황위를 노려 입지와 목숨을 위협한 정적으로 여긴 정치적인 이유와 당대의 상식적인 이유도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매번 언급되지만 율법에 적힌 처벌로도 충분히 해도 될 것을 복수심에 눈이 돌아가 어린 제후왕을 암살하고 잔인한 사적제재를 가한 것은 옹호할 수 없는 사안이 맞다. 실제 기록에 남은 척부인과 관련된 여후의 비판 의견들도 자세히 보면 잔혹성과 비인간성, 도넘은 복수심과 지나친 투기를 주제로 비판했지 황후가 주제넘게 황제의 후궁을 죽였다고 비난하거나 척부인을 동정할 지 언정 그 행동을 옹호한 경우는 없었음을 알 수 있는데 척부인의 행동도 질타 및 처벌받을 사안이 맞았다는 것을 인정함과 동시에 정실로서 첩을 벌한 것 자체는 타당하게 여겼거나 전혀 문제시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여후 사후 후일 유항이 5대 문제로 즉위했을 당시, 문제는 황후 효문황후 두씨와 총애하는 후궁 신부인과 함께 상림원의 행사에 참여했었다. [[원앙(전한)|원앙]]은 신부인의 좌석을 두황후의 것 보다 뒤로 끌여내렸는데 문제와 신부인은 원앙의 태도에 분노했다. 이에 원앙은 "폐하께서 첩실을 사랑하신다면 후하게 상을 내리십시오. 폐하께서 신부인을 대하시는 바는 후에 신부인에게 필시 화가 미치게 됩니다. '''폐하께서는 옛날 인간돼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습니까?'''" 라고 비판을 했다. 즉 정실의 권한과 입지를 존중하지 않은 채 함부로 첩을 정실보다 위로 대하면서 편애하면 척부인 꼴이 날 수도 있다는 의미. 이에 문제와 신부인은 정신을 차려 원앙에게 예를 표하고 금을 주었다. 물론 이 부분도 신부인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단 문제의 행동에 대한 비판이 큰데, 마찬가지로 유방이 척부인을 아낄수록 여후는 더욱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그나마 이걸로 처리한걸로 끝냈으면 잔혹하다는 평가로 그쳤을 지 몰라도 여후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자기 아들인 혜제에게도 인간돼지가 된 척부인을 보여주었다. 아마 자신보다는 유약한 성품인 아들에게 황제 지위에 도전하는 자의 말로는 이런 것이다 보여주며 강해지라는 의미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 광경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그대로 드러누웠던 혜제는 눈을 뜬 뒤 "사람이 되어서 이럴 수는 없습니다. '''어머니의 아들인 저 또한 무슨 염치로 천하를 다스리겠습니까.'''"라고 말한 후 정치에서 손을 뗀 채 술독에 빠져 버렸다고 한다. 결국 혜제는 엄청난 [[트라우마]]로 인해 폐인과 다름없이 지내다가 23세의 젊은 나이로 붕어하고 말았다. 단 미쳐서 틀어박혔다는 혜제가 이후로도 여기저기 나타나곤 했기 때문에 정말 폐인 같이 살았는지는 의심스럽다. 정치에서 손을 놓은 이유는 단순히 트라우마로 마음의 병을 얻어서가 아니라 당시 재상 조참의 의견을 따랐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존재한다. 아들 [[혜제(전한)|혜제]]가 죽은 이후, [[전소제(전한)|전소제]]가 즉위하지만[* 전소제는 여태후가 데려온 남의 아이라는 설과 여씨 일족의 아이라는 설과 혜제와 후궁 사이의 아이라는 설이 있는데 어느 설이 확실한지 현재로써도 불확실해서 전소제의 진짜 혈통은 지금도 불확실하다.] 나이가 어렸기에 여후가 [[섭정]]으로서 국가 권력을 좌지우지 하게 되었다. 이때 곡을 하면서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는데 진평은 이것이 신변에 불안감을 느껴서 그런 것이라는 조언을 했고, 이에 제국의 군권을 큰오빠 여택의 두 아들 여태·여산과 작은오빠 여석지의 아들 여록 등 친족들에게 맡겼는데 이것이 여씨 천하의 기반이 되었다. 또한 측근인 [[심이기]]의 직위가 좌승상인데도 불구하고, 은근슬쩍 낭중령까지 겸임하게 하면서 위병을 전부 통제하에 놓았고, 왕명의 출납을 둘이서만 맡으면서 궁궐의 모든 일을 처리하게 되었다. 이렇다보니 [[심이기]]는 여후와 불륜을 저질렀다는 소문이 돌아서[* 여후가 항우에게 사로잡혔을 당시 심이기도 같이 잡혔는데 이때 심이기는 태공과 여후를 돌봤고 그러면서 서로 눈이 맞아서 이후 불륜을 저지른 게 아니냐는 것. 물론 크게 근거가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심이기가 여후를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둘렀던 건 사실이다. 물론 심이기는 상술되었다시피 여후가 항우에게 사로잡혀 있었을 당시 그녀를 모셨던 인물이니 여후가 그를 신임한 것 자체는 당연한 일이긴 했다.] 혜제에게 죽을 뻔했다. 대신들도 다들 [[심이기]]를 싫어했기에 나몰라라 했다고. 여후 사후에는 공신들의 주적이 되어서 탄핵되었고, 여씨 몰살 후 잠시 복직되었지만 [[문제(전한)|한 문제]] 3년, 회남왕 유장에게 살해당했다. 이 과정에서 남편 [[한고제|유방]]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연왕의 자리를 큰오빠 여택의 손자인 '''여'''통에게 주었고, 이를 위해 전 연왕인 유방의 서자 유건의 아들을 죽이기까지 했다. 이러던 중 황제 유공이 자신의 친모가 여후에게 살해당했다는 얘기를 듣고 나이만 들면 여후를 가만두지 않겠다며 이를 갈고 있다는 것이 여후의 귀에 들어갔다. 여후는 황제가 성장하면 자신에게 보복할 것을 우려하여 [[이리니|유공의 정신에 문제가 있다는 구실로 폐위시키고 유홍을 즉위시켰다. 이때는 명목상 새 황제가 즉위했는데도 연호조차 바꾸지 않았다.]] 여후의 주무기(?)는 짐주(鴆酒)라는 이름의 술을 가장한 독이었다. 이것은 독사를 먹고 사는 새인 [[짐새]]의 깃털로 담근 술이었다고 한다. 조왕 유여의도 이것으로 죽였고, 혜제가 권했다고 하나 황제보다 상석에 앉으려고[* 제왕 유비가 고조의 서장남, 즉 혜제의 큰형님이었기 때문이다. 혜제는 상술한 유여의 일화에서 볼 수 있듯이 배다른 형제들도 지극히 아꼈던 어진 사람이라 자신의 신하임에도 불구하고 유비를 깍듯이 형님 취급했다.] 했던 제왕 [[유비(전한)|유비]]를 보고 위험시해 연회중 [[혜제(전한)|혜제]]와 건배할 때 짐주로 바꿔치기 해서 먹이려다 되레 '''자기 아들내미가 그 잔을 잡고 마시려고''' 하자 무시무시한 속도로 잔을 엎어버렸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제왕 유비는 여후의 친딸인 노원공주에게 봉지의 상당부분을 헌납하는 것으로 여후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이때가 딱 인간돼지 사건으로 시름시름 앓던 혜제가 모처럼 일어났던 때였다. 어린 동생과 그 어미가 살해당한 충격으로 1년을 내리 앓던 아들에게 이번엔 그 눈 앞에서 보란듯이 다른 형제를 독살하려고 한 것이다. 그나마 제왕 유비는 운이 매우 좋은 편. 조왕 유여의는 짐주를 먹고 사망했으며, 또 다른 유방의 서자 조유왕 유우는 조나라에서 말 한번 잘못 했다가 여태후에게 잡혀서 굶어죽는 비참한 신세가 됐다. 여태후는 조유왕을 죽이고 또 다른 유방의 서자 유회를 양나라에서 조나라로 옮겨 조공왕으로 삼고 또 여씨의 사위로 삼았는데, 조공왕이 딴 여자를 사랑하자 이 여씨 왕비가 [[짐독]]으로 그 여자를 죽였다. 조공왕은 상심이 커서 자결했고 여태후는 조공왕이 여자 때문에 목숨을 버렸다며 조나라를 조공왕에게서 뺏어 자기 조카 여록(呂祿, ? ~ 기원전 180)에게 주었다. 결국 유방의 아들 중 여후의 친아들인 혜제에다 유비, 유여의, 유회, 유우, 유건의 여섯 명이 여후 때문에 여러모로 불행해진 셈이었다. 그나마 대왕(代王) 유항(훗날 [[문제(전한)|한 문제]])과 회남왕 유장만이 멀쩡할 수 있었는데, 대왕 유항은 어머니 박씨가 유방에게 총애받지 못했기에 피해갔고[* 후술하겠지만 이게 전화위복이 되었고, 한나라 전체 역사로 보면 최후의 승리자가 되었다. 심지어 사후에나마 여후의 직위였던 고황후 자리까지 갖게 된다.], 두 동생 조유왕과 조공왕이 횡사한 후 여태후가 조나라 왕위를 제안하자 겸손하게 거절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회남왕 유장은 어머니 조씨가 여태후와 무관한 건으로 죽었는데 그 후 여태후가 키워줘 그나마 정이 있었던 듯. 그러나 이 유장마저 어머니가 일찍 죽은 것을 불쌍히 여긴 문제가 유장을 오냐오냐 길렀고, 이에 유장이 점점 비뚤어져, 불행한 결말을 맞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